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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 18. 23:15 - Samantha

[무라카미 하루키 - 상실의 시대]인위적인 쿨함이 주는 어색함.

무라카미 하루키 상실의 시대

와타나베는 마치 결정장애자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는 자신 스스로도 그 시크함을 즐기고 있는 듯했고, 마침 세상을 다 살아본것마냥 그렇게 한쪽으로 치우지지 않은 삶을 살려고 부단이 애쓰는 것처럼 보였다. 나오코는 그저 세상을 살아가기엔 강인한 힘을 갖길 거부하는, 여리다 못해 여린 아이처럼 어리광부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에 반해 온전히 끌리는 대로 사는 듯한 미도리가 제일 인상적이었다. 느끼는대로, 생각하는대로, 말하는대로, 보이는대로 세상을 사는듯한 미도리는 꽤나 쾌활하고, 유쾌하고, 자기만의 색깔을 가진 사람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나는 내게 없는 그 강렬하고도 다양한 빛깔을 가진 그녀에게 제일 이끌렸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와는 별도로 ‘상실의시대’를 처음 접한 내 느낌은 인위적인 쿨함이었다. 남들이 말하는 대작이다, 명작이다라는 그런 타이틀 제외하고 그냥 내 느낌이 그랬다.

분명 그는 풍경이나 도시, 일상을 묘사하는 것에는 탁월한 능력이 있다. 독자가 노력하지 않아도 그 장소와 그 냄새, 그리고 그 사람들과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은 선사해준다.

그러나 억지로 인물에게 쿨함의 이미지를 덧씌우는듯한 느낌은 내겐 이질적이었다. 이를테면 마치 이런 것이다. “저 여자는 너무 예뻐, 저여자는 너무 섹시해. 저여자는 진짜 이뻐”등 자꾸만 인물 간의 대화로 그 여자가 이쁘다고 굳이 강요하는 느낌이다. 조금 더 간접적인 설명으로 이미지를 떠올리고 싶었는데, 이는 마치 누군가에 의해 그 캐릭터에 대한 이미지를 강요당한 느낌이 들어 사실 개운치않았다.

어쨌뜬 캐릭터는 인위적이었고, 인위적인 쿨함과 일본인과는 멀리 떨어져있어 머릿 속에 그림을 떠올리기가 어려웠다. 왠지 내 머릿 속에는 타인을 생각하느라 어쩔 줄 몰라하는, 그래서 자신의 감정을 숨겨야만 하는 일본인이 먼저 그려졌다. 그래서 자신의 감정에 한껏 심취한 이들 캐릭터의 배경이 일본이라는 사실이, 그래서 더더욱 쿨함의 이미지를 덧씌우려고 노력하는 듯한 모습이 엿보이는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