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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2. 9. 00:16 - Samantha

컴퓨터를 뜯는 게 취미인 '공구부녀'

나른한 토요일 저녁, 따뜻한 장판 위에 엎드려서 블로깅을 하고 있는데, 주중에 지방에서 일하다가 집에 오신 아빠가 옆에 쓱 오더니 “이건 무슨 컴퓨터냐”라고 물어보셨다. “새로 산 맥북인데요?”라고 말했더니 아빠가 장난스레 꿀밤 한 대를 때리시고는 “전에 사용하던 컴퓨터는 어디있냐”고 궁금해하셨다. 그리고 일요일 오후, 아빠와 나는 같이 구형 노트북의 기판을 다 뜯어보고 내부 청소를 하는 대작업에 착수했다.

현재 IT분야와 관련된 기사를 쓰는 에디터로 일하고 있으며, 학부 전공은 바로 ‘컴퓨터공학’이었다. 컴퓨터와의 접점이라고 해봤자 초등학교 5, 6학년 정보화 수업때 그림판으로 그림을 그리고, 중학교 때는 집에 있던 HTML 교본으로 홈페이지를 만들고 놀았던 일밖에 없었던 내게 ‘공대진학’은 정말 생각치도 못한 선택이었다.당시 이과생이었던 나는 ‘식품영양학’, ‘물리학과’, ‘생활기술과’ 등의 학과를 적어내려갔지마는 마음에 드는 것이 영 없었다. 도대체 내가 뭘 공부하고 싶은지, 뭘 잘할 수 있는지 갈팡지팡하던 찰나, ‘어렸을 때부터 그나마 관심을 가지고 많은 시간을 할애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라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답은 딱 하나였다. 바로 컴퓨터.


아빠가 회사에서 오자마자 하는 일은 스탠드 불을 켜서 컴퓨터를 만지는 일이었다. 23년 전, 당시 300만 원에 상당하는 286 컴퓨터는 아빠의 보물 1호이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어렸을 떄부터 5.25인치 FD를 가지고 놀게 됐고, 컴퓨터와 씨름하는 아빠 옆에 앉아 아빠가 하는 일을 구경하는 게 취미가 됐다. “아빠 이거 뭐야? 아빠 뭐해?”라고 질문하면서 정말 ‘껌딱지‘마냥 아빠 옆에 붙어 있었다. PC통신 세대는 아니지만 아빠가 전화선을 PC에 연결해서 PC통신으로 텍스트/음악 파일을 받는 작업을 졸린 눈을 비벼가며 구경하고는 했다. 처음으로 GUI기반의 윈도우 계열의 컴퓨터를 샀을 때도 팔짝팔짝 손을 흔들면서 좋아했다. 1남 2녀에서 장녀였던 나는 유일하게 아빠가 하는 일에 정말 사사건건 관심이 많았다. 엄마 말로는 “아빠가 업고 키운 건 너 밖에 없다”고는 하시는데 글쎄. 그냥 아빠 유전자를 더 많이 물려받은 것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은 넉넉한 편은 아니었지만 고등학생 때에는 3남매에게 1인당 1PC가 지급됐다. 물론 아빠가 회사에서 가져온(작동이 되지 않은 PC를 직접 수리하여 중고 모니터와 연결한) PC이기는 했지마는, 그것만으로도 마냥 좋았다. 자연스럽게 아빠 덕분에 컴퓨터에 입문하고, 그렇게 지금은 생활의 일부가 됐다.

만일 컴퓨터공학에 진학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IT 관련 글을 쓰는 일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처럼 아빠와 많은 접점을 두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싶기도 하다. 모든 학부 전공생이 자신의 전공 분야를 잘 아는 것도 아닐 뿐더러, 사실 나의 수준은 겨우 ‘과감하게 블루스크린 문제 해결하고 운영체제 알아서 깔고 파티션 나눌 수 있는’ 정도에 불과했다. 사실 공대 기술 이론으로 뭔가를 해볼 마음은 없었고, 그때부터 글쓰는 일을 해야겠다고만 마음먹은 수준이었다.

그런데 아주 기술적인 부분에 관해 글을 써야 하니, 기본적인 개론 정도는 숙지할 필요성을 느끼게 됐다. 최근 보고서는 모바일의 메인 부품 가운데 하나인 Applicaion Processor와 64비트 컴퓨팅 동향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프로세서에 관한 기본적인 이해조차 제대로 숙지하지 못했다는 점에 부끄러움을 이제서야 느끼게 됐다. 학부때 조금 더 열심히 할 껄, 그런 아쉬움.

노트북을 뜯어 보면서 메모리가 몇이네, CPU 성능이 뭐네 하면서 아빠랑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너무 좋을 수밖에 없었다. 이론을 통해 나는 컴퓨터 내부 부품이라던가 메커니즘을 이해하기 시작했고, 아빠는 경험적으로 습득한 하드웨어 메커니즘에 관련된 지식을 내게 이야기한다는 것을 놓고 바로 이런 것이 부전여전이라고 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교수집안에서는 교수, 가수집안에서는 가수가 나온다더니, 어렸을 때부터 무엇을 보고 느끼느냐에 따라 사람의 인생이 달라진다는 데 딱 그짝인 모습이었다.

얼마 전에는 애쉬튼 커처가 주연을 맡은 영화 ‘잡스’를 보면서 잡스의 일대기가 궁금해 위키백과를 찾아보기까지 했다. 양부모의 손에서 자란 잡스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의 지인들 사이에 자라면서 전자공학 이론과 실습에 눈을 뜨게 됐다는 설명이 기술돼 있었다. 자신이 진짜 원하는 꿈과 잘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모르겠다면, 어린 시절에 무엇을 가지고 놀았는지 되돌아보는 것이 이래서 중요하다는 걸 느끼는 하루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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