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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 24. 14:29 - Samantha

[영화]맨 프럼 어스 -과거를 부정하는 것=자신의 인생을 부정하는 일

교수 ‘존’은 종신 교수직을 제의받은 찰나 돌연 어디론가 떠난다고 선포했다. 이를 걱정한 교수들이 송별회 겸 그의 집에 모인 가운데, 존은 사실 14000년을 살아온 크로마뇽인이라 뜬근없는 선전포고를 한다. 동료 교수들은 각자 자신의 전문 분야를 토대로 존과 대화를 하며, 그의 말이 완전히 거짓일 수 없는, 신빙성이 있을 수도 있다고 판단하기에 이르른다. 그러나, 존이 부처의 배움을 중동에 전파하려다 ‘어느새 내가 예수가 되어 있었다’라는 대목에 이르르자,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에디스가 당장 그 말을 취소하라며 역정을 내며, 급기야 눈물을 흐르기까지 한다.

여기서 나는 에디스가 보인 눈물은 무슨 의미였을지 의문을 품었다.

맥락상으로 존이 예수를 모독해서 화났다기 보다는 에디스가 수십년 간 믿고, 자신의 세계관 확장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무엇’의 존재가 더이상 절대적인 선이나 가치가 아닌 사실에 대한 분노였을 것이라 짐작해볼 수 있다.

삶을 살아가는 ‘원동력’, 지적 탐구욕을 채워주는 ‘연구대상’, 나를 구원해 줄 유일한 ‘희망’을 모두 허상이었노라고 인정하게 된다면 에디스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삶의 트랙을 걸어온 자신의 인생을 전부 부정하게 되는 셈이다. 결국 이는 자신이 참으로 덧없고 무상한 인생을 살아온거라며, 참혹하게도 ‘늙은 여자’만 있는, 보잘 것 없는 껍데기만 남았다는 박탈감을 느끼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래서인걸까, 일부 보수 단체가 왜그토록 비뚤어진 역사관을 가지고 그런 일련의 행동을 벌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어쨌든 자신들은 전쟁과 궁핍함을 겪어온 아주 단단하고 건강하고, 또한 올바른 청년들이었고, 그를 이끌어준 당이나 전대통령에 대한 충성심은 이루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을 부정하고 현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자신들의 청춘은 왠지 불쌍하다. 그래서 현재가 잘못됐고, 과거가 찬란했노라고 주장을 펴는 것이다.

결국 동료 교수들의 요구에 존은 자신의 이야기가 거짓말이었음을 고백한다. 결말에 이르러서는 실제로 존의 말이 사실이었음을 뒷받침하는 정황이 포착되는데, 결국 존은 동료 교수들에게 떠안길 충격이 크다는 것을 인지하고 ‘거짓말’이었다고 거짓말했던 것이다.

자신이 보고 듣고 배운 것이 ‘지식의 총체’이며,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과거’이자, 현재 내가 살고 있는 ‘나라’라며 믿고, 아니 그게 당연하다고 받아들이고 살아온 이들에게는 당연한 혼란스러움을 야기할 수 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이는 마치 ‘트루먼쇼’의 트루먼이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 밖으로 진짜 세계가 있다는 것을 30대가 되어서야 알게된 것과 마찬가지다.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를 부셔야만 다른 세계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건 나의 안위를 보증할 수 없는 대단한 모험일 테니까.